2009년 9월 18일 금요일

바람 불어 좋은 날

오늘 같이 회사가 조용한 날에는 자리에 앉아 있다보면 이런 저런 생각이 난다. 그런데 갑자기 이 영화가 생각났다. 이 영화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예전에 썼던 감상이 있어서 올려 본다.

 

1.   "서독 같은 나라는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아이를 낳으면 세금을 면제해 준데

프랑스에서는 아이를 낳기만 하면 병원비도 공짜고 3번째 아이를 낳을때는 나라에서 아예 돈까지 준다고 한데..."

"우리나라는 날이 갈수록 살기 힘들어질거야... 사람이 좀 많아야지..."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이발소 여종업원인 미스유(김보연)가 춘식(이영호)에게 하는 말이다.

현재, 전라남도 전역과 충청북도 청원군 등 28개 시·군·구에서는 출산장려를 위한 출산축하금을 지급하고 있고, 서울과 인천시에서는 셋째아이 이후 출생아가 보육시설에서 양육중인 경우에는 보육료를 지원하고 있다.

1980년에 만들어진 영화니 25년 전이다.

이 영화는 시간적으로 그만큼 지금과 떨어져 있다.

미스유는 춘식에게 기술을 배울 것을 권유한다.

자격증이라도 있어야 이 사람 많은 곳에서 버틸 수 있다고 하면서...

절대 사랑한다고 얘기하지 않으면서 춘식을 사랑하는 미스유다.

2.    "하룻밤 자 줬다고 내가 니 맘대로 될거라 생각했어?"

덕배(안성기)가 명희(유지인)에게 처음 들은 말이다.

물론 덕배에게 한 말은 아니다.

"누구 사귀어 본 적 있어요? 키스는 해 봤어요? 내가 가르쳐 줄까요?"

명희는 덕배를 설래게 하지만, 거기서 멈춘다.

디스코장에서 쌩뚱맞게 사물놀이 춤을 추는 덕배와 그것을 즐기는 명희다.

3.   "겨우 50만원? 그걸로 무슨 호텔을 하냐"

"시작이 반이야. 일단 시작했으니까 끝을 볼 수 있어"

"이 좀 닦고 뽀뽀해..."

이 닦는 길남(김성찬)에게 주인 아저씨는 물 값이 많이 나온다고 타박한다.

여관 종업원인 길남에게 미용실종업원 진옥(이연? 맞나 모르겠네)은 첫 사랑이다.

영화는 이 6명을 중심으로한 러브스토리로 내용을 풀어간다.
그들은 영화상으로 성북동인 서울로 편입된 지 얼마 안되는 허름한 변두리 지역에 살고 있다. 실제로는 천호동에서 찍었다고 한다. 철거가 이루어지고 연립맨숀(정확히 맨숀으로 나오더군)이 곳곳에 들어서 있고 조금만 더 움직이면 고급주택가가 늘어서 있는 곳이다.

춘식, 길님, 덕배 이들은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촌놈이다.

"서울인구가 800만인데 진짜 서울 사람은 8만도 안된다"는 영화 속 표현처럼 그 1/10의 세계에 들어서고자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이 그저 서울가서 돈 벌어 보겠다고, 돈 벌어 잘 살아 보겠다고 무작정 올라온 이들이다. 중국집 배달원인 덕배, 여관 종업원인 길남, 이발소 직원인 춘식은 여러 직업을 거쳐 지금 이 곳에 있다.

춘식은 같은 이발소에서 일하는 미스유를 사랑한다.
미스유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어린 동생들과 병든 아버지를 수발하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시골 여성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부동산으로 벼락부자가 된 늙은 회장님(최불암-이 시대 아버지의 대명사인 최불암이 졸부로 나오는 것도 큰 재미다)의 정부가 된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춘식보다는 돈을 택한다. 돈은 사랑을 억누르기에 충분한 것이다.

춘식은 그 늙은 회장님을 칼로 찌른다. 춘식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 때문에 감옥에 가지만, 그건 그가 그 상황에서 모든 것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덕배는 부잣 집 딸 명희에게 끌린다.

덕배는 말을 더듬는다. 포니를 끌고가던 부잣집 딸 명희에게 치이면서 만남을 이간다. 명희에게 덕배는 남자라기 보다는 신기한 동물 또는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 같다. 덕배는 세련됨과 미모를 지닌 그녀에게 반한다. 춘식의 여동생 춘심(임예진, 세바퀴의 그 임예진 맞음)사이에서 잠시 갈등하기도 한다.

그녀는 덕배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고 한산한 강변(영화속 강변은 이때도 두물머리더군요)을 드라이브하고, 디스코 클럽에서 춤을 춘다. 덕배는 그 곳에서 자신이 살던 농촌의 사물놀이를 떠올리고 그 춤을 추지만, 조명 아래 사물놀이 춤은 호기심으로 비춰지는 것 같다. 명희는 덕배에게 몸을 주지는 않는다. 명희는 그저 자신의 자유를 즐기기 위해 잠시 덕배를 선택했을 뿐, 그와는 다르다는 계급의식을 잠재의식 속에 갖고 있는 인물이다. 결국 덕배는 좌절하지만, 다시 용기를 내 복싱을 시작한다.

길남은 자신의 사랑에게 배신당한다.

서울에 올라와 첫 정을 주고 사랑했던 진옥에게 길남은 배신을 당한다. 진옥은 길남이 호텔을 짓겠다며 그동안 모아 두엇던 돈을 챙겨 도망을 친다. "애개 겨우 50만원"이라며 폄하했던 그 돈을... 길남은 돈보다 그녀가 자신을 속인게 서러워서 운다. 이들 주변에는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부부(김희라, ???)가 있다. 세 친구가 피곤에 지칠 때면 찾아 위로 받는 곳이다.

결국 세 친구들은 한명은 감옥으로 한명은 군대로 한명은 링위로 간다. 꿈을 갖고 꿈을 위해 살았지만, 서울 아니 세상이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다. 길남은 입영통지를 받고 군대로 떠난다. 춘식의 여동생은 김밥을 싸와서 길남을 배웅하고 길남은 덕배와 춘식의 여동생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이 떠날 때까지 손을 놓지 말라고 당부한다. 덕배는 바람불어도 흔들리지 않아야 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덕배, 춘식, 길남은 여전하다

거의 30년전 영화지만, 그 캐릭터들은 지금도 유효하다. 포니가 BMW로, 맨숀이 타워팰리스로, 디스코클럽이 나이트로, 여관이 모텔로, 서독이 한국으로 바뀌었지만 아직 세상은 같다. 변한 건 껍데기들일 뿐이다.

이 영화는 이장호 감독이 황석영의 '객지'를 영화화 할려다가 노동자 얘기가 나온다고 대신 만든 것이라고 한다. 대마초 흡입으로 4년간 활동을 못한 후 재기작으로 들고 나온 영화다. 밑바닥에서 바라본 여러 모습을 영화에 그대로 살렸다고 한다. 덕배, 춘식, 길남은 외양을 달리한채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처음에 언급한 3개의 에피소드들은 단어 몇개만 바꾸면 지금도 유효하다. 자격증 없으면 취직도 안 되고 있고, 빈부격차는 심해진 상태로 여전하며 그에 따른 계급도 존재한다.

결국, 세상은 변한 것 같지만 그리 변하지 않은 것이다. 벽을 느끼고, 그 벽에 도전하고, 그 벽에 막혀 좌절하고, 다시 한번 도전하고 그게 세상이다. 그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다. 세상을 치장하는 화려한 겉모습들은 꾸준히 변하고 있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는 큰 변화가 없다.

현미경으로 바라볼 때 세포들은 매우 활발히 움직인다. 어떤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지는 과학자가 아니기에 잘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현미경을 갖고 본다면 같다. 모두가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그 세포위에 뭘 씌우던 속의 세포들은 꾸준히 움직이고 있다.

군사정권이 끝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고, 월드컵 4강에 오르고, 정권이 바뀌고 또 바뀌었지만, 덕배, 춘식, 길남의 삶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ps) 춘식역으로 출연한 이영호는 이장호 감독의 친동생이다.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151

  영화 소개한 네이버 링크인데 성인 인증을 받아야 볼 수 있음

Plutarch, 『Essays』중 "On Listening"을 읽고

수업을 위한 리딩 중 하나인 플루타르크의 에세이 중 on listening을 읽고 나서 내 삶에 대해 많은 반성을 하였다. 내가 그동안 참으로 '듣기'에 대해 소홀히 해 왔던 점을 깨달았다. 나의 말을 하고, 나의 생각을 전할 것에만 치우쳐 남의 말을 듣고 남의 말을 이해하기를 멀리 해 왔다. 게다가 내가 그동안 해 온 일의 상당 부분은 남의 말을 전달하는 일이었음에도 말이다.

 

플루타르크는 “말하는 사람이 결함이 있거나 수완이 부족해도 그들 각자는 듣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나름의 특별한 방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듣는 사람은 이를 존중해 충분히 들어봐야 한다”고 말한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듣는 방법을 익히기 전에 말하기를 연습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말하기 보다는 많이 들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에 더해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보다 적게 얘기하는 사람은 만나기 힘들다”면서, “다른 사람이 말하는 동안 듣지 않고 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백번 맞는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와 같이 말이 앞서는 사회(차 사고 나면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말이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에서 되새겨 볼만한 내용이다.


이렇듯 듣기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플루타르크는 듣는 자세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그는 “파티의 손님도 할 일이 있듯이, 말하는 것을 그냥 듣기만 해서는 안 되고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의 동료이자 말하는 내용의 일부분”이라며 “말하는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고 고개를 가끔씩 끄덕이는 등”의 행동을 할 것을 주문하였다. 또, “이해에 대한 과도한 욕망과 경쟁심으로 요점을 파악하기도 전에 내용을 이해하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결국 손해 보는 일”이고, 그렇다고 해서 “어린 새가 남이 갖다 주는 것을 먹으려고 입을 벌리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말하는 바를 수고 없이 주워 먹으려고 하면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 올바른 듣기가 올바른 삶의 근간이라는 결론이다.


이 모든 내용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과 인간이 만나 대화를 나눔에 있어 지켜지면 좋을 원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유치원에서 배웠던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부터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음을 고백해야 한다.

 

“이웃을 비판하는 것만큼 쉬운 것은 없지만, 똑같은 기준을 나에게도 적용해야 한다”는 플루타르크의 말을 지금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누구나 자유롭게 ‘입’을 열지만 들어주는 ‘귀’는 닫혀 있는 사회이면서 반대쪽 ‘입’은 서로 막으려고 하는 상황이다. 그 ‘입’에서는 서로 비판만 있을 뿐 칭찬은 없다. “먼저 들으면서 참은 뒤 면대면으로 자신의 논리를 설명한다”면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지적되는 부분들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또, 억지로 칭찬하지 않더라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만큼의 보상을 받고, 받을 만큼의 존경을 받는 것보다 더 좋은 보상과 존경은 없다”는 말을 서로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옛날 글이고 영어로 중역한 것이라 읽기가 너무 어려웠지만, 이를 악물고 읽은 보람이 있었다.

 

책과 관련한 자세한 정보는

http://books.google.co.kr/books?id=0U-hsAonP1AC&pg=PA5&lpg=PA5&dq=plutarch+%22essays%22&source=bl&ots=xxuGWbs0J2&sig=SZzjDd60D6oXwT3oz-cKfZkimdE&hl=ko&ei=1tqySqe3FcyDkAXzpaHgCw&sa=X&oi=book_result&ct=result&resnum=3#v=onepage&q=&f=false

2009년 9월 10일 목요일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독후감

  고백하자면, 창동 사람인 나는 입대를 얼마 남기지 않았던 시기에 이 책을 읽고, 1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10여 년을 창동 밖에서 살다가 다시 창동으로 돌아온 그 주부터 이 책을 다시 읽었다. 10여 년의 간극은 같은 책(물론, 번역본을 읽었기에 개역판과 4판이라는 차이는 존재한다)을 읽음에도 새로운 책을 읽는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 간극은 “그렇게 향기로울 수 없는 장미 꽃 냄새”를 풍기던 여인을 오누이로 여기게 되기까지의 기간보다 길기에 새로운 책으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0여 년 전에는 그저 추리소설로 읽었고, 10여 년이 흐른 뒤 다시 읽었지만, 여전히 ‘브루넬로’를 추측해 낼 수 없는 ‘난쟁이’의 자리에서 다시 읽은 것에 불과하다. 하나 변한 것이 있다면 ‘웃음’을 짓지만, ‘웃는’ 것이 아닌 상황을 이해하는 정도일 것이다. 이는 복잡한 ‘장서관’을 굳이 파헤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닳아 버린 사람이 됐음을 의미한다. ‘조과’ 시간에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파헤치느니 공통의 ‘이단’을 설정하고 그 범위에서 벗어나 안위를 추구하려 한다.


  “진정 진리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라는 논쟁을 벌이던 밥벌이 공간을 떠나면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두려워” 해서는 아니었고, 진리를 만들어내고 그 진리를 설파하는 모습, 그것을 ‘보기에 좋다’고 말하는 것에 어울리지를 못했다. 나의 두 아이가 던지는 질문에 ‘진리’를 얘기하지 못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그 밥벌이 공간을 떠나는 자리에서 여러 시간 동안 ‘웃었던’ 기억이 난다.


  책을 읽고 나서의 본인의 생각을 적으라는데 이렇게 자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더 이상 진행해서는 안 된다. 왜 이 이야기를 했는지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2페이지라는 공간을 채우기 위해 ‘잠시 나의 얘기를 빌려 놓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를 읽는 눈이 있기’ 때문이고, ‘대화를 주고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대화를 주고 받아야 이 잡담으로 가득 찬 두 장짜리 글이 ‘벙어리’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본문으로 돌아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적은 이유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에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이다. A4 용지에 한글 기본 설정으로 반 페이지 정도로 쓴 나와 관련된 내용으로 상대방이 나와 나에 대해 얼마나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을까란 질문이다. 지금 이 내용들은 ‘독’을 발라 놓고 ‘볼록 거울’로 시선을 피하며 ‘문’을 여러 개로 꼬아 놓았다. 예를 들어, 두 아이의 성별과 같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이 글만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질문이 들어온다면 그것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에게 얼마든지 ‘진리’를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것이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일까?


  『장미의 이름』을 다시 읽고 난 느낌이 바로 그렇다. 솔직히 다시 읽었지만 전혀 이해가 안 간다. ‘꼬여 있다’는 느낌이다.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는 그리 좋은 시선을 갖고 있지 못하며, 서양 역사에 대해서는 아주 무지한 나로써는 당연하다. 게다가 나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분도 몇 달에 걸쳐 읽은 책을 불과 1주일 사이에 읽었으니 더욱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역사, 철학, 종교, 기호학 등등을 공부하고 다시 읽는다면 그 ‘꼬임’을 풀어낼 수 있을까?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그저 나에겐 영화 ‘세븐’과 비슷한 류의 추리소설로 읽힌다. 그래서 재미있었다. 그 외 다른 의미를 찾으려 하지도 않았고 찾을 수도 없었다.


  커뮤니케이션을 ‘share of meaning'이라고 정의한다면 난 이 책과 제대로 커뮤니케이션하지 못하고 있다. 의미와 재미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저기 문헌을 찾아보니 글을 쓴 에코의 말 중“더 많은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추리(미스테리)‘적 성격으로 글을 썼다”는 말이 눈에 띄었다. 재미있게 쓰고 싶었다는 말이었다. 나 같은 무지한 사람을 대상으로 ’재미‘라는 의미를 공유하고 싶었다는 것으로 이해됐다. 즉, 나는 에코와 『장미의 이름』을 통해 ’재미‘를 커뮤니케이션한 것이다.


  문헌을 검색해 보니, 『장미의 이름』에 관한 수많은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 굉장한 의미들이 놀라울 정도의 논리와 근거를 갖춰 제시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적 해석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해석들이 무지한 나에게는 다 맞는 말로 보인다. 에코가 그 많은 해석을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많은 해석이 나오게끔 글을 썼다는 점은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수많은 의미를 공유할 수 있었기에 전세계적으로 수천만부나 팔렸을 터이다.

책을 읽은 사람이 수천만 명이라고 가정한다면, 각 개인은 자신의 개인적, 환경적 상황에 따라 미디어의 이용 동기가 달라진다는 이론처럼 책을 읽게 된 동기도 정확히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굉장히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에 따른 이용의 행태도 다양할 것이고, “무질서한 것 같아도 나름대로 다 온당한” 이유를 갖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느낀 ‘재미’도 그렇게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앞부분의 나의 이야기는 『장미의 이름』의 글쓰기 형태를 흉내 내어 써 보았다. 나를 아는 누군가는 그 내용을 읽고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것이지만, 나를 모르는 누군가는 나에 대해 알 듯 하면서도 모호해 지기를 바라는 의도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를 어떻게 이해하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굉장히 정확한 정보를 썼더라도 나에 대한 이해는 사람에 따라 당연히 다를 것임은 경험을 통해 숙지한 부분이다. 난 그것이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쓴 이유라고 파악했다. 물론, 난 에코처럼 ‘재미’를 공유하지는 못했다.


  어떤 해석에 대한 의견과 비판을 제시하기 보다는 에코의 글쓰기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데 초점을 맞추어보았다. 책을 읽으면서는 에코와 ‘재미’를 통해 커뮤니케이션 하였지만, 이 글을 쓰면서는 다른 ‘의미’를 찾아 본 것이다. 맞든 틀리든 나에게는 ‘의미’가 있는 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