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10일 목요일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독후감

  고백하자면, 창동 사람인 나는 입대를 얼마 남기지 않았던 시기에 이 책을 읽고, 1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10여 년을 창동 밖에서 살다가 다시 창동으로 돌아온 그 주부터 이 책을 다시 읽었다. 10여 년의 간극은 같은 책(물론, 번역본을 읽었기에 개역판과 4판이라는 차이는 존재한다)을 읽음에도 새로운 책을 읽는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 간극은 “그렇게 향기로울 수 없는 장미 꽃 냄새”를 풍기던 여인을 오누이로 여기게 되기까지의 기간보다 길기에 새로운 책으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0여 년 전에는 그저 추리소설로 읽었고, 10여 년이 흐른 뒤 다시 읽었지만, 여전히 ‘브루넬로’를 추측해 낼 수 없는 ‘난쟁이’의 자리에서 다시 읽은 것에 불과하다. 하나 변한 것이 있다면 ‘웃음’을 짓지만, ‘웃는’ 것이 아닌 상황을 이해하는 정도일 것이다. 이는 복잡한 ‘장서관’을 굳이 파헤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닳아 버린 사람이 됐음을 의미한다. ‘조과’ 시간에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파헤치느니 공통의 ‘이단’을 설정하고 그 범위에서 벗어나 안위를 추구하려 한다.


  “진정 진리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라는 논쟁을 벌이던 밥벌이 공간을 떠나면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두려워” 해서는 아니었고, 진리를 만들어내고 그 진리를 설파하는 모습, 그것을 ‘보기에 좋다’고 말하는 것에 어울리지를 못했다. 나의 두 아이가 던지는 질문에 ‘진리’를 얘기하지 못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그 밥벌이 공간을 떠나는 자리에서 여러 시간 동안 ‘웃었던’ 기억이 난다.


  책을 읽고 나서의 본인의 생각을 적으라는데 이렇게 자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더 이상 진행해서는 안 된다. 왜 이 이야기를 했는지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2페이지라는 공간을 채우기 위해 ‘잠시 나의 얘기를 빌려 놓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를 읽는 눈이 있기’ 때문이고, ‘대화를 주고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대화를 주고 받아야 이 잡담으로 가득 찬 두 장짜리 글이 ‘벙어리’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본문으로 돌아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적은 이유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에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이다. A4 용지에 한글 기본 설정으로 반 페이지 정도로 쓴 나와 관련된 내용으로 상대방이 나와 나에 대해 얼마나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을까란 질문이다. 지금 이 내용들은 ‘독’을 발라 놓고 ‘볼록 거울’로 시선을 피하며 ‘문’을 여러 개로 꼬아 놓았다. 예를 들어, 두 아이의 성별과 같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이 글만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질문이 들어온다면 그것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에게 얼마든지 ‘진리’를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것이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일까?


  『장미의 이름』을 다시 읽고 난 느낌이 바로 그렇다. 솔직히 다시 읽었지만 전혀 이해가 안 간다. ‘꼬여 있다’는 느낌이다.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는 그리 좋은 시선을 갖고 있지 못하며, 서양 역사에 대해서는 아주 무지한 나로써는 당연하다. 게다가 나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분도 몇 달에 걸쳐 읽은 책을 불과 1주일 사이에 읽었으니 더욱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역사, 철학, 종교, 기호학 등등을 공부하고 다시 읽는다면 그 ‘꼬임’을 풀어낼 수 있을까?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그저 나에겐 영화 ‘세븐’과 비슷한 류의 추리소설로 읽힌다. 그래서 재미있었다. 그 외 다른 의미를 찾으려 하지도 않았고 찾을 수도 없었다.


  커뮤니케이션을 ‘share of meaning'이라고 정의한다면 난 이 책과 제대로 커뮤니케이션하지 못하고 있다. 의미와 재미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저기 문헌을 찾아보니 글을 쓴 에코의 말 중“더 많은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추리(미스테리)‘적 성격으로 글을 썼다”는 말이 눈에 띄었다. 재미있게 쓰고 싶었다는 말이었다. 나 같은 무지한 사람을 대상으로 ’재미‘라는 의미를 공유하고 싶었다는 것으로 이해됐다. 즉, 나는 에코와 『장미의 이름』을 통해 ’재미‘를 커뮤니케이션한 것이다.


  문헌을 검색해 보니, 『장미의 이름』에 관한 수많은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 굉장한 의미들이 놀라울 정도의 논리와 근거를 갖춰 제시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적 해석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해석들이 무지한 나에게는 다 맞는 말로 보인다. 에코가 그 많은 해석을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많은 해석이 나오게끔 글을 썼다는 점은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수많은 의미를 공유할 수 있었기에 전세계적으로 수천만부나 팔렸을 터이다.

책을 읽은 사람이 수천만 명이라고 가정한다면, 각 개인은 자신의 개인적, 환경적 상황에 따라 미디어의 이용 동기가 달라진다는 이론처럼 책을 읽게 된 동기도 정확히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굉장히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에 따른 이용의 행태도 다양할 것이고, “무질서한 것 같아도 나름대로 다 온당한” 이유를 갖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느낀 ‘재미’도 그렇게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앞부분의 나의 이야기는 『장미의 이름』의 글쓰기 형태를 흉내 내어 써 보았다. 나를 아는 누군가는 그 내용을 읽고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것이지만, 나를 모르는 누군가는 나에 대해 알 듯 하면서도 모호해 지기를 바라는 의도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를 어떻게 이해하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굉장히 정확한 정보를 썼더라도 나에 대한 이해는 사람에 따라 당연히 다를 것임은 경험을 통해 숙지한 부분이다. 난 그것이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쓴 이유라고 파악했다. 물론, 난 에코처럼 ‘재미’를 공유하지는 못했다.


  어떤 해석에 대한 의견과 비판을 제시하기 보다는 에코의 글쓰기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데 초점을 맞추어보았다. 책을 읽으면서는 에코와 ‘재미’를 통해 커뮤니케이션 하였지만, 이 글을 쓰면서는 다른 ‘의미’를 찾아 본 것이다. 맞든 틀리든 나에게는 ‘의미’가 있는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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